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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이 설계한 우아하고 처절한 지옥도

by N번째 인생 2026. 1. 14.

안녕하세요, N번째 인생체험 리뷰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영화 팬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 역시 개봉 소식을 듣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오늘 리뷰할 영화는 이병헌, 손예진이라는 압도적인 캐스팅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쩔수가없다>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을 바쳐 이룩해 온 '안정'이라는 성벽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추락 과정마저 얼마나 '어쩔 수 없는' 필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지를 지독하게 파고듭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블랙 코미디가 결합되어, 웃고 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묘한 체험을 선사합니다.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하고, 제가 느낀 전율과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쩔수가 없다 리뷰
영화 어쩔수가 없다 포스터, 출처 : CJ ENM, 모호필름


평범한 가장의 붕괴,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들

 영화의 서사는 제지 회사에서 25년간 헌신하다가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만수(이병헌 분)의 시점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영화 초반부, 만수가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에서 의외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귀신이 나오거나 살인마가 쫓아오는 공포가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안고 있는 '사회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스크린을 뚫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절박함을 아주 건조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그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성실하고 계획적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만수의 살인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제목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처럼 그려집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관객은 살인자인 만수를 비난해야 마땅하지만, 어느새 그의 범죄가 발각되지 않기를 응원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감독은 이 지점을 아주 영리하게 파고들어, 관객을 도덕적 혼란의 늪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병헌 배우의 눈빛은 불안과 광기,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소름 끼치게 표현해 냈습니다. 특히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면에서의 미세한 안면 근육 떨림은 압권이었습니다.


박찬욱의 미장센: 잔혹함 위에 덧입혀진 우아함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논할 때 '미장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작 <헤어질 결심>이 안개처럼 모호하고 몽환적인 미장센을 보여줬다면, <어쩔수가없다>는 날카롭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향연입니다. 종이(제지 회사)라는 소재가 주는 날카로움, 하얀 A4 용지와 붉은 피의 색채 대비는 시각적으로 강렬한 자극을 줍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연출 포인트는 바로 '소리'의 활용이었습니다. 종이가 베이는 소리, 볼펜을 딸깍거리는 소리 등 일상적인 소음들이 만수의 심리 상태에 따라 끔찍한 파열음처럼 들리도록 사운드 디자인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또한, 카메라 앵글은 철저히 계산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을 짓누르는 듯한 하이 앵글이나, 좁은 복도에 갇힌 만수를 보여주는 폐쇄적인 구도는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잔혹한 장면이 등장할 때조차 그 구도가 너무나 회화적이어서, 관객은 혐오감과 동시에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폭력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주인공의 비틀린 내면을 시각화한 장치로 해석됩니다. 미술 감독 류성희와 박찬욱 감독의 협업은 이번에도 역시나 한국 영화의 미적 기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병헌과 손예진, 그리고 광기의 앙상블

 이병헌 배우의 연기가 영화의 중심을 잡고 끌고 간다면, 손예진 배우가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공기를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미리는 남편의 실직과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광기를 보여줍니다. 손예진 배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청순하거나 멜로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습니다. 그녀가 짓는 미소 뒤에 숨겨진 서늘함은 만수의 폭주만큼이나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두 배우가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씬에서는 대사보다 그들 사이 흐르는 침묵이 더 큰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더불어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유연석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경쟁자들과 주변 인물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제거 대상'으로 소비되지 않고, 만수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절박함(혹은 욕망)을 가진 인간 군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경쟁자로 등장하는 인물과의 대면 씬에서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가 폭발하는데,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대화의 핑퐁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실소를 터뜨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웃픈' 상황들이 모여 영화의 비극성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모든 배우가 주연급 연기를 펼치니, 연기 구멍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앙상블이었습니다.


총평 및 추천 대상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성실하게 살아온 죄밖에 없는 당신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면?"이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스릴러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원작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면서도 한국 사회 특유의 계급적 불안과 교육열, 체면 문화를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제목이 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 모든 일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요? 여러분의 관람 후기는 어떠신가요?

🎬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박찬욱 감독 특유의 치밀한 미장센과 연출을 사랑하시는 분
  • 이병헌, 손예진 등 명품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를 보고 싶으신 분
  •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블랙 유머를 즐기시는 분
🚫 이런 분들에게는 조금 아쉬울 수 있어요.
  • 잔인하거나 피가 나오는 묘사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
  • 명쾌한 권선징악이나 희망적인 결말을 선호하시는 분
  • 느린 호흡과 심리 묘사보다는 빠른 액션을 원하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