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이 개봉한 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생충> 이후 6년 만의 복귀작이자, 할리우드 자본과 시스템이 결합된 SF 대작이라는 점에서 그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개봉 직후의 반응은 사뭇 뜨거우면서도 차가웠습니다. "봉준호다운 블랙 코미디의 정점"이라는 찬사와 "기대했던 스펙터클한 SF 블록버스터가 아니다"라는 실망감이 공존했기 때문이죠.
이제 거품과 소음이 걷힌 2026년 1월, OTT 플랫폼을 통해 <미키 17>을 다시 마주하며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차분하게 복기해 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시각적 쾌감보다는 '존재의 대체 가능성'에 대한 서늘한 농담에 가깝습니다. 극장에서 놓쳤던 디테일과 1년 후 재평가되는 이 영화의 진가를, 저의 N번째 관람 경험을 바탕으로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죽어야 사는 남자, '익스펜더블'의 아이러니
영화는 얼음 행성 '니플헤임'을 개척하기 위해 파견된 인류의 고단한 여정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위험한 임무를 전담하는 소모품 인력, 일명 '익스펜더블(Expendable)'인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가 있습니다. 미키는 죽으면 전임자의 기억을 이식받아 새로운 육체로 다시 프린트되는 존재입니다.
원작 소설 <미키 7>과 달리 영화는 17번째와 18번째 미키의 공존이라는 독창적인 각색을 시도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지점은 바로 이 '죽음의 일상화'를 다루는 봉준호 감독의 태도입니다. 보통의 SF 영화라면 클론의 존재론적 고뇌를 심각하게 다뤘겠지만, 봉 감독은 이를 지극히 관료적이고 권태로운 직장인의 애환처럼 묘사합니다.
미키 17은 죽는 것보다 다시 살아나서 노동해야 하는 내일이 더 두려운 인물입니다. 그가 죽음을 거부하고 살아남아 미키 18과 마주하는 순간, 영화는 생존을 위한 스릴러가 아닌, "누가 진짜인가"를 두고 다투는 부조리극으로 변모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통렬하게 비꼬는, 가장 봉준호스러운 화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소화한, 나사 빠진 듯하면서도 생존 본능만은 뚜렷한 미키의 눈빛은 이 아이러니를 완벽하게 대변합니다.
계급 투쟁의 확장판: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넘어 우주로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계급'입니다. <설국열차>가 수평적인 계급 투쟁을, <기생충>이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다뤘다면, <미키 17>은 이를 우주라는 고립된 공간으로 확장시킵니다.
니플헤임 기지 내부는 철저한 계급 사회입니다. 안락한 구역에서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마크 러팔로 분)과 목숨을 걸고 얼음 평야로 나가는 미키의 대비는 선명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전 작품들과 다른 점은 '투쟁의 방식'입니다. 미키는 체제 전복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오늘 하루 덜 아프게 죽거나, 혹은 몰래 살아남아 맛있는 식사 한 끼를 더 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관객들의 호불호를 가른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봅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통쾌한 반란이나 영웅적인 서사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미키의 소소하고 찌질한 생존 방식은 다소 맥 빠지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미키의 태도는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소시민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나의 안위'와 '오늘의 휴식'이 더 중요한 시대 정신을, 봉 감독은 SF라는 외피를 빌려 날카롭게 포착해 낸 것입니다.
호불호의 원인 분석: 마케팅의 배신인가, 낯선 문법인가?
개봉 당시 평론가들은 호평했으나 대중 평점이 엇갈렸던 현상은 마케팅 포인트와 실제 작품 톤의 괴리에서 비롯된 측면이 큽니다. 예고편은 화려한 우주 활극을 예고했지만, 실제 영화는 대사가 많고 템포가 독특한 블랙 코미디였으니까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OTT 환경에서 이 영화는 재평가받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에 압도되지 않고, 인물의 표정과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미키 17>의 디테일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특히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베르토 캐릭터와의 케미스트리나, 죽음을 서류 처리를 위한 행정 절차쯤으로 여기는 기지 내의 블랙 유머는 두 번째 관람에서 더 큰 웃음을 유발합니다.
또한, 미술과 프로덕션 디자인의 완성도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3D 프린팅으로 인간을 찍어내는 기계의 질감이나, 차갑지만 묘하게 아름다운 니플헤임의 풍광은 봉준호 감독이 시각적 스토리텔링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줍니다. 흥행 성적이라는 숫자에 가려져 있던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이제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기입니다.
결론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로 할리우드 시스템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한 수작입니다. 비록 <어벤져스> 같은 화끈한 액션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감동적인 휴머니즘은 없을지라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서늘한 질문을 던지며 낄낄거리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2026년 1월, 혹시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거나 개봉 당시 실망감에 잊고 계셨다면 다시 한번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 거대한 스펙터클 뒤에 숨겨진, 지독하게 인간적인 SF의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추천 대상 & 비추천 대상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엇박자 유머와 사회 풍자를 좋아하는 분, 화려한 액션보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SF를 선호하는 분, 로버트 패틴슨의 섬세한 연기를 보고 싶은 분.
- 이런 분께 비추천합니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활극을 기대하는 분, 명확하고 속 시원한 권선징악 결말을 원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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