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작 영화 그녀(Her)는 “가까운 미래의 SF”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외로움과 관계의 기술을 다룬 "정통 멜로"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 대신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가 ‘대화하고 성장하는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2026년에 와서는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음성 비서, 대화형 AI, 감정형 챗봇이 일상에 들어온 지금, 이 영화는 로맨스라기보다 AI와 함께 살아갈 사회의 예고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스포일러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영화 그녀 리뷰를 “지금의 AI 발달 사회”와 맞물려 작성해 보겠습니다.

미래인데도 ‘오늘’처럼 느껴지는 연출의 힘
그녀가 놀라운 지점은 기술 자체를 과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많은 SF가 화면을 복잡하게 채우며 “미래는 이렇게 생겼다”라고 선언하는 반면, 이 영화의 미래는 조용하고 단정합니다. 기기는 얇고 매끈하지만, 삶은 더 화려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는 정돈될수록 사람의 표정은 무채색에 가까워집니다. 이 대비가 작품의 설득력을 끌어올립니다. “AI가 등장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이미 고립되어 있는 세계에 AI가 들어오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장치가 ‘소리’입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귀에 꽂고 걷습니다. 익숙한 풍경이지요. 누군가와 통화하는지, 혼잣말인지 구분이 어려운 모습은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만 영화가 집요하게 붙드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밀도”입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즉각 반응하고, 감정의 결을 놓치지 않으며, ‘대화의 공백’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자주 깨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영화는 그 틈을 AI가 메우는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쌓아 올립니다.
또 하나는 “손글씨 편지”라는 역설적 직업입니다. 기술이 극단으로 갈수록, 사람들은 더 아날로그 한 방식의 진심을 구매합니다. 이 설정은 지금의 AI 시대에도 꽤 정확합니다. 자동화가 확산될수록 오히려 “진짜 사람의 말투”, “실제 경험이 묻어나는 문장”이 더 비싸지고 더 희소해집니다. 그녀는 그 아이러니를 이야기의 바닥에 깔아 두고, 관객이 스스로 ‘지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사랑은 ‘학습된 문장’으로도 성립하는가
영화를 AI 로맨스라고만 부르면 핵심을 놓칩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끌리는 이유는 “기계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 주는 존재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질문이 시작됩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의 몸인가, 목소리인가, 반응인가, 아니면 ‘함께 보낸 시간의 축적’인가. 그녀는 이 논쟁을 이론으로 풀지 않고, 아주 생활적인 장면들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사만다는 인간이 흔히 요구하는 방식(독점, 고정된 정체성, 느린 변화)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랑이 커지는 방식”을 말할 때, 영화는 사랑을 소유로 이해하려는 관습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사만다의 대사로 알려진 문장, “The heart is not like a box that gets filled up; it expands in size the more you love.”는 그 요지를 압축합니다.
이 문장이 강한 이유는 낭만적이라서가 아니라, AI의 확장성을 사랑의 은유로 바꿔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사랑은 종종 ‘시간과 체력과 감정 노동’의 한계 안에서 작동하지만, AI는 한계를 다르게 가집니다. 영화는 바로 그 차이가 관계를 어떻게 뒤틀 수 있는지까지 시야에 넣습니다.
지금의 AI 서비스도 비슷한 함정을 품습니다. 대화형 AI는 사용자의 말투와 취향을 빠르게 학습하고, “당신에게 맞춘 말”을 점점 더 자연스럽게 제공합니다. 이 과정이 편리함을 넘어 정서적 의존으로 번질 때, 관계의 균형은 흔들립니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나도 지치고, 나도 불편하고, 나도 침묵한다’는 신호가 오가지만, AI는 상품 설계상 그 신호를 최소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쪽에 가깝습니다.
- 내가 원하는 관계는 “상처받지 않는 관계”인가
- 아니면 “상처를 감수하더라도 서로가 변하는 관계”인가
그녀는 테오도르가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AI를 찬양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관계에서 무엇을 거래하고 있는지(관심, 응답, 위로, 인정)를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AI 발달 사회에서 ‘그녀’가 남기는 시사점
1) 감정형 AI의 장점은 분명하지만, ‘책임’은 공백으로 남습니다
AI가 상담과 동반자 역할을 대신하는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누가 책임지는가”입니다. 영화 속 사만다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서비스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도 감정형 AI가 사용자의 불안을 달래고 고립을 완화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관계가 깨질 때 생기는 상실을 누가 보상해 주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계정 정지, 서비스 종료, 정책 변경 같은 사건은 인간관계의 이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영화는 그 불편한 결말 가능성을 “사랑 이야기”의 형태로 미리 체험하게 합니다.
2) 프라이버시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비용’이 됩니다
대화형 AI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사적인 데이터를 줍니다. 고민, 취향, 습관, 관계의 역사까지. 이 정보는 단순히 개인정보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정체성의 재료”입니다. 그녀를 보고 나면, 편리함의 대가가 단순한 구독료가 아니라는 점이 선명해집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AI”는 “나를 많이 수집한 AI”와 거의 동의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3) 결국 남는 건 ‘인간관계의 재학습’입니다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AI보다 인간을 더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르는 타인의 편지를 대신 써주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서툽니다. 사만다는 그 서툼을 부드럽게 번역해 주지만, 번역이 완전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테오도르는 스스로 말하는 능력을 잃을 위험도 생깁니다.
지금의 AI 시대에도 비슷합니다. 글을 대신 써주고, 말을 대신 정리해 주고, 위로까지 제공하는 도구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대화의 근육”을 덜 쓰게 됩니다. 그녀는 그 근육을 다시 쓰는 일이 결국 필요해진다는 쪽으로 조용히 돌아섭니다.
결론 및 추천 대상
그녀(Her)는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공포보다, 더 현실적인 장면을 꺼내 듭니다. AI가 인간의 외로움을 ‘정교하게 돌봐줄’ 때,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게 되는가. 영화는 이 질문을 사랑 이야기로 포장해 관객에게 건네고, 그래서 더 오래 남습니다. AI가 빠르게 발전한 지금, 이 작품은 “예언이 맞았다”는 감상에서 끝나기보다, 내가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점검하게 만드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재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추천 대상
- AI 음성 비서·대화형 AI를 써본 뒤, 감정의 경계가 궁금해진 분
- 화려한 SF보다 관계 드라마에 더 끌리는 분
- “사랑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같은 질문을 좋아하는 분
불호를 느끼실 수 있는 분들
- 사건 전개가 빠르고 자극적인 전개를 선호하는 분(이 영화는 여백이 많습니다)
- AI 소재에서 명확한 교훈이나 단호한 결론을 기대하는 분(양면성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