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패션 영화처럼 보이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는 사실 “일이 나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직장 성장담에 가깝습니다. 미란다의 독설은 자극적이고, 앤디의 변신은 시원한데, 이상하게 마지막엔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죠. 이 영화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패션이 예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하면서 한 번쯤 겪는 ‘선택의 무게’(꿈, 관계, 자존감)를 너무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1) ‘악마’는 누구였나: 미란다보다 무서운 건 시스템
미란다는 보통 ‘최악의 상사’로 요약되지만, 영화가 더 무섭게 그리는 건 따로 있습니다. 미란다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미란다를 필요로 하는 세계예요. 그녀가 한마디 하면 브랜드의 광고 예산이 움직이고, 표지가 바뀌고, 누군가는 커리어가 올라가거나 꺾입니다. 즉 미란다는 괴물이라기보다, 그 업계가 만들어낸 최적의 결과물에 가깝죠.
그래서 영화 속 “A million girls would kill for this job.” 같은 대사는 단순한 가스라이팅이 아니라, 희소한 자리 + 대체 가능한 노동 + 꿈을 담보로 한 경쟁이 섞인 업계 문법처럼 들립니다. 이 문법 앞에서 앤디는 계속 흔들립니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건가, 선택당한 건가’ 같은 질문을요.
여기서 제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지점은, 미란다가 늘 정답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겁니다. 그녀도 가끔은 권력 유지 때문에 사람을 교체하고, 관계를 거래로 바꾸는 순간이 있죠. 영화는 그걸 멋있게 포장하기보다, 은근히 차갑게 보여줍니다.
2) 앤디의 변신이 시원한데 찝찝한 이유
이 영화의 쾌감은 단연 ‘변신’입니다. 옷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고,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죠. 그런데 그 과정이 묘하게 찝찝한 건, 변신이 곧 성장이라기보단 ‘적응’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앤디는 패션에 무지하지만, 대신 자기 기준이 선명합니다. “난 기자가 될 거야.” 이 목표가 중심을 잡아주죠. 하지만 런웨이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익히는 동안, 목표가 목표답게 남아있기보다는 성과에 먹히는 느낌이 들어요. ‘1년만 버티자’였던 계획이 ‘이왕 하는 김에 인정받자’로, 그리고 어느 순간 ‘인정받는 내가 좋다’로 미끄러집니다.
이게 왜 현실적이냐면, 직장에서 변하는 건 옷만이 아니라 시간의 쓰임새거든요. 약속이 밀리고, 전화가 우선이 되고, 사과는 늦어지고, 결국 관계는 “이해해줘”로 버티게 됩니다. 영화는 그걸 연애 갈등으로만 소비하지 않아요. 앤디가 진짜로 잃는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속도에 대한 주도권이라는 쪽에 더 가깝게 찍습니다.
3) 패션 영화가 아니라 ‘직장’에 관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곱씹게 만드는 핵심은 “패션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아니라, “중요한 세계에서는, 중요하지 않던 것까지 중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세룰리언 블루’(푸른색) 장면이 상징적이죠. 앤디는 패션을 허영으로 보지만, 미란다는 그 허영이 어떻게 산업을 만들고 사람들의 선택을 지배하는지 논리로 눌러버립니다.
여기서 영화의 톤이 재밌는 게, 미란다가 늘 악당처럼 그려지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프로의 세계”를 대변하는 얼굴에 가깝죠. 그리고 앤디가 진짜로 성장하는 순간은, 명품을 걸쳤을 때가 아니라 일의 구조를 이해했을 때입니다.
다만 그 성장의 비용이 큽니다. 영화는 “성공하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단정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묻는 것 같아요.
- 성공을 원한다면, 어떤 종류의 냉정함을 배워야 하는가?
- 그 냉정함이 ‘능력’인지 ‘습관’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 내가 원하는 커리어는, 나라는 사람을 더 넓게 만드는가, 더 좁게 만드는가?
이 질문 때문에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거의 현대판 직장 성장 서사(약간의 공포 포함)로 남습니다.
4) 지금 다시 보면 더 아픈 포인트, 미리 알면 재밌는 포인트
요즘 이 영화가 다시 자주 소환되는 건, 단지 유행이 돌아서가 아니라 일의 방식이 더 촘촘해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메신저 알림, 24시간 연락, “지금 가능?” 같은 한 줄이 일상을 잘게 쪼개는 시대에, 런웨이의 전화벨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미란다가 내뱉는 마지막의 무심한 한마디들(“That’s all.” 같은)은 멋있어서 밈이 됐지만, 그 밈의 진짜 무서움은 감정이 ‘비용’으로 처리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는 데 있어요.
다정함이 사치가 되고, 설명은 낭비가 되고, 사람은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됩니다. 영화는 이걸 ‘패션계만의 이야기’로 가두지 않고, 성과 중심 조직이라면 어디든 재현 가능한 풍경으로 확장해요. 그래서 업계가 달라도, 이상하게 내 얘기처럼 들립니다.
(덧붙여, 최근 속편 제작 소식까지 더해지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화제가 되는 흐름도 있어요. ‘잡지 산업의 변화’가 이야기의 큰 축이 된다는 보도들이 나오면서, 1편의 질문이 지금 시점에 더 선명해졌고요.)
관람 전 알면 더 재밌는 포인트
- 원작은 로런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2003)이며, 미란다의 모델로 안나 윈투어가 거론되며 오랫동안 화제가 됐습니다. (최근에도 당사자가 영화에 대해 코멘트한 보도가 나왔어요.)
- 의상과 편집(몽타주)이 사실상 ‘대사’ 역할을 합니다. 특히 초반 오프닝~변신 몽타주~파리 파트는 이야기 압축의 교과서에 가깝습니다.
결론: 프라다를 입지 않아도 남는 것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결말은 통쾌한 복수도, 완벽한 성공도 아닙니다. 대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다시 꺼내놓죠. 저는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버티면 이긴다” “참으면 배운다” 같은 문장으로 스스로를 설득하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입니다.
"버티는 동안, 나는 무엇이 되었나?"
이 질문을 남기는 순간, 이 영화는 그냥 ‘악마 상사’ 풍자극이 아니라, 커리어를 꿈꾸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 리뷰 한 편이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다시 틀게 되는 작품이었고요.
재미를 느끼실 독자분
- 직장 생활, 커리어 성장의 딜레마를 좋아하는 분
- “성공의 비용”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찾는 분
- 패션을 몰라도 리듬감 있는 드라마를 보고 싶은 분
재미를 못 느끼실 독자분
- 직장 내 가스라이팅/압박 묘사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분
- 사건 중심의 강한 반전, 서스펜스를 기대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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